간에이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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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에이 대기근은 1642년 전후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으로, 1630년대부터 이어진 이상 기후와 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1640년 홋카이도 고마가타케 산의 분화, 1641년의 가뭄과 폭우 등 자연재해와 함께 무사 계급의 경제적 어려움, 과도한 지출, 시장의 미비 등이 기근을 심화시켰다. 에도 막부는 기근 대책으로 검약, 쌀농사 장려, 주조 통제, 구호 시설 설치 등을 시행했으며, 후다이 다이묘에게 산킨코타이를 부과하는 등 정치적 변화도 가져왔다. 간에이 대기근은 에도 막부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기근 관리와 사회 정책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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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대기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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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발생 시기 | 17세기 |
주요 피해 지역 | 일본 |
원인 | 기상 이변, 정치적 요인 |
영향 | 대규모 아사자 발생 사회 불안정 심화 인구 감소 |
상세 내용 | |
시기 | 에도 시대 전기 간에이 시대 (1641년 - 1643년) |
배경 | 간에이 시대의 기근 시마바라의 난 이후 사회 혼란 막부의 미흡한 대응 |
피해 규모 | 전국적인 흉작 아사자 수십만 명 발생 농촌 사회 붕괴 |
영향 | 사회 불안 심화 막부의 권위 실추 인구 감소 및 사회 구조 변화 |
막부의 대응 | 구휼미 지급 검약령 발표 효과 미흡 및 부정부패 심각 |
영향 | 쇼군 권위 실추 막부 정치에 대한 불신 심화 사회 불안정 가중 |
참고 사항 | 간에이 시대의 기근 중 가장 큰 규모 이후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발생의 원인 중 하나 |
2. 기근의 배경
간에이 대기근은 간에이 19년(1642년) 전후에 가장 심각했지만, 그 이전부터 여러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간에이 15년(1638년)경에는 규슈에서 발생한 우역이 서일본 지역으로 확산되어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간에이 17년(1640년) 6월에는 홋카이도 고마가타케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의 영향으로 무쓰국 쓰가루 지방 등에서 흉작이 계속되었다.
이듬해인 간에이 18년(1641년) 초여름에는 수도권, 주고쿠 지방, 시코쿠에서 가뭄이 발생한 반면, 가을에는 폭우가 내렸고,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장마와 냉풍으로 인한 피해가 잇따랐다. 그 외에도 호우, 홍수, 가뭄, 서리, 병충해 등 전국적으로 이상 기후가 속출했다. 동일본에서는 태평양 연안보다 동해 연안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이후 덴포 대기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간에이 통보를 발행하여 화폐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과잉 주조와 흉작으로 인한 물가 상승으로 돈의 가치가 급락하자, 같은 해 12월에는 주조를 전면 중단해야 했다. 동시에 막부는 공정 시세로 간에이 통보를 매입하고 동서 간의 교통 유지를 위해 도카이도 등의 역참 마을을 지원했다.
흉작은 이듬해인 1642년에도 이어져 백성들의 도산과 인신 매매 등 기근의 영향이 가시화되자, 막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여러 다이묘에게 영지에 부임하여 기근 대책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다음 달인 6월에는 국가에 대해 검약령을 내리고, 벼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담배 재배와 매매를 금지했다. 또한, 주조 통제(신규 주조 및 소재지의 주조 금지, 도시와 가도 주변의 반감), 잡곡을 사용하는 우동, 칼국수, 소면, 만두, 남만 과자, 메밀국수의 제조 및 판매 금지, 구제소 설치 등 구체적인 기근 대책을 지시하는 교지를 발표했다. 이는 기독교 금지와 더불어 막부가 전국의 백성에게 직접 내린 법령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이후 막부 기근 대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이때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기근 대책을 위해 영지로 돌아갈 것을 명하면서,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참근교대가 부과되었다.
간에이 19년 말부터 이듬해인 1643년에 걸쳐 굶어 죽는 사람이 늘고, 에도를 비롯한 삼도에서 인구 유동이 발생했다. 막부와 여러 번은 굶주린 사람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각 번의 다이칸에게 인도했다. 또한 쌀 부족과 쌀값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묘의 봉급 쌀을 에도로 보냈다. 3월에는 논밭의 영구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대기근의 배경에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에 걸친 동아시아 규모의 기상 이변 외에도, 에도 시대 초기 무사 계급의 빈곤, 참근교대, 대규모 토목 공사, 장군의 상경과 일광사참 등 무단 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막부와 번의 막대한 지출, 연공미를 교환할 시장의 미비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막부는 사무라이의 몰락을 사치와 낭비 탓으로 보고, 무가제법도 등을 통해 절약을 지시했다. 예를 들어, 1635년 무가제법도 개정으로 막부는 참근교대를 1년 교대로 의무화했지만, 한편으로는 참근교대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무사의 빈곤은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대기근의 토양이 되었다고 평가된다.[8]
2. 1. 복합적인 자연재해
간에이 17년(1640년) 6월, 홋카이도 고마가타케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무쓰국쓰가루 지방 등에 쏟아져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혔다.[2] 이듬해인 1641년에는 초여름부터 기나이, 주고쿠 지방, 시코쿠 등 서일본 지역에 가뭄이 발생했다. 반면,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가을에 폭우와 냉해, 장마 등이 겹쳐 큰 피해가 발생했다.[3] 이 외에도 전국적으로 잦은 호우, 홍수, 가뭄, 서리, 병충해 등이 발생하여 농작물 생산량이 급감했다.[4] 특히, 동일본 지역에서는 태평양 연안보다 동해 연안 지역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덴포 대기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2. 2. 사회경제적 요인
시마바라의 난(1637-1638) 이후 국내 실향민이 대량 발생하고, 1638년 규슈에서 발생한 우역이 서일본으로 확산되면서 소가 떼죽음을 당해 1640년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농업 생산성이 감소했다.[8] 사무라이 계급의 빈곤은 농민 수탈을 심화시켜 농업 생산 의욕을 저하시켰다.[8] 1635년 참근교대 개혁으로 다이묘들의 에도 방문 빈도가 늘면서 지출이 증가했고, 도카이도 건설로 인한 노동력 부족, 1641년 통화 정책 실패에 따른 경제 혼란도 농업 생산성 감소를 부추겼다.[8]에도 시대 초기, 막부와 번은 무단 정치를 추진하며 참근교대, 대규모 토목공사, 장군 상경, 일광사참 등으로 막대한 지출을 했고, 연공미 유통 시장은 미비했다.[8]
막부는 사무라이 몰락의 원인을 사치와 낭비로 보고 무가제법도를 통해 절약을 지시했다. 1635년 무가제법도 개정으로 참근교대를 1년 교대로 의무화했지만, 과도한 비용 지출은 자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빈곤은 결국 농민 수탈로 이어져 대기근의 원인이 되었다.[8]
3. 기근의 전개
간에이 19년(1642년) 전후를 기점으로 기근이 최대 규모로 확대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간에이 15년(1638년) 무렵, 규슈에서 발생한 소역이 서일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간에이 17년(1640년) 6월에는 에조 고마가타케가 분화하여, 그 화산재의 영향으로 무쓰국 쓰가루 지방 등에서 흉작이 발생했다.
간에이 18년(1641년) 초여름에는 기나이, 주고쿠 지방, 시코쿠 등지에서 가뭄이 발생했고, 가을에는 호쿠리쿠 지방에 폭우가 쏟아지며 장마와 냉풍 피해가 잇따랐다. 전국적으로 폭우, 홍수, 가뭄, 서리, 해충 피해 등 이상 기후 현상이 속출했다. 동일본에서는 태평양 연안보다 동해 연안 지역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훗날 덴포 대기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간에이 통보를 발행하여 화폐 통일을 추진했지만, 흉작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화폐 과잉 주조로 인해 돈의 가치가 급락하여, 같은 해 12월 주조를 전면 중단해야 했다.
간에이 19년(1642년)에는 기근이 심화되어 백성들의 도산과 인신매매가 증가하는 등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막부는 대책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여러 다이묘에게 영지로 돌아가 기근 대책에 힘쓰도록 지시했다. 6월에는 전국에 걸쳐 검약 장려, 담배 재배 및 매매 금지, 주조 통제, 잡곡을 사용한 음식 제조 및 판매 금지, 구호 오두막 설치 등 구체적인 기근 대책을 지시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간에이 19년(1642년) 말부터 이듬해인 간에이 20년(1643년)에 걸쳐 굶어 죽는 사람(아사자)이 증가하고, 에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인구 유동이 발생했다. 막부와 여러 번은 기근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각 번의 다이칸에게 인도했다. 또한 쌀 부족과 쌀값 폭등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묘의 봉급미(품삯 쌀)를 에도로 돌려보냈다. 3월에는 전답 영대 매매 금지령을 내려 토지 매매를 금지했다. 1643년의 작황은 평균 수준으로 회복되면서 기근은 점차 종식되었다.
대기근의 배경으로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에 걸친 동아시아 규모의 이상 기후 외에도 여러 요인이 거론된다. 에도 시대 초기의 무사 계급의 빈곤, 산킨코타이나 데쓰다이후신, 장군의 조락 및 닛코 샤산 등과 같이 무단 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막부와 번의 막대한 지출, 연공미를 환전할 시장의 미비 등이 그것이다.
막부는 무사 몰락의 원인을 사치와 낭비로 보고, 무가제법도 등을 통해 검약을 지시했다. 예를 들어, 1635년 무가제법도 개정에서 막부는 산킨코타이를 1년마다 교대로 하도록 의무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킨코타이에 과도한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당부했다. 무사의 빈곤은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졌고, 이는 대기근의 바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마바라의 난, 간에이 대기근, 로닌의 불만을 배경으로 도쿠가와 이에쓰나 시대에 일어난 막부 전복 계획인 게이안의 변 등을 거치면서, 막부는 무단 정치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막부 정치는 백성무육(百姓撫育, 백성이 전란과 기근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상황)을 추진하고, 여러 다이묘에게 부과했던 대규모 공사를 줄이고 산킨코타이로 대체하였다. 여러 번 역시 뒤늦게나마 번정 개혁에 착수했다.
3. 1. 1641년: 흉작과 기근의 시작
寛永일본어 18년(1641년) 초여름, 기나이, 주고쿠 지방, 시코쿠 등지에서 가뭄이 발생했다. 반면 가을에는 호쿠리쿠 지방에 폭우가 쏟아지고 장마와 냉풍 피해가 잇따랐다. 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폭우, 홍수, 가뭄, 서리, 해충 피해 등 이상 기후 현상이 속출했다. 동일본에서는 태평양 연안보다 동해 연안 지역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훗날 덴포 대기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8] 당시 에도 막부는 간에이 통보를 발행하여 화폐 통일을 추진했지만, 흉작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화폐 과잉 주조로 인해 돈의 가치가 급락하여, 같은 해 12월 주조를 전면 중단해야 했다.3. 2. 1642년: 기근 심화와 막부의 대응
간에이 19년(1642년)에는 기근이 심화되어 백성들의 도산과 인신매매가 증가하는 등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막부는 대책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여러 다이묘에게 영지로 돌아가 기근 대책에 힘쓰도록 지시했다.6월에는 전국에 걸쳐 구체적인 기근 대책을 지시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검약 장려
- 벼농사를 짓지 않는 행위를 막기 위해 담배 재배 및 매매 금지
- 주조 통제(신규 주조 및 소재지 주조 금지, 도시와 가도 주변 주조 절반으로 감소)
- 잡곡을 사용하는 우동, 칼국수, 소면, 만두, 남만 과자, 소바 등의 제조 및 판매 금지
- 구호 오두막 설치
이 포고령은 기독교 금지와 더불어 막부가 전국의 백성들에게 직접 내린 법령으로서 주목받고 있으며, 이후 막부의 기근 대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또한, 이때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기근 대책을 위해 영지로 돌아갈 것을 명하면서,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산킨코타이가 부과되게 되었다.
3. 3. 1643년: 아사자 증가와 기근의 종식
간에이 19년(1642년) 말부터 이듬해인 간에이 20년(1643년)에 걸쳐 굶어 죽는 사람(아사자)이 증가하고, 에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인구 유동이 발생했다. 막부와 여러 번은 기근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각 번의 다이칸에게 인도했다. 또한 쌀 부족과 쌀값 폭등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묘의 봉급미(품삯 쌀)를 에도로 돌려보냈다.[5] 3월에는 전답 영대 매매 금지령을 내려 토지 매매를 금지했다.1643년의 작황은 평균 수준으로 회복되면서 기근은 점차 종식되었다.[6]
4. 기근의 영향
간에이 19년(1642년) 전후로 기근이 가장 심각했지만, 그 이전부터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간에이 15년(1638년)경에는 규슈에서 발생한 소역이 서일본으로 확산되어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간에이 17년(1640년) 6월에는 에조 고마가타케가 분화하여 화산재의 영향으로 무쓰국 쓰가루 지방 등에서 흉작이 발생했다.[8]
이듬해인 간에이 18년(1641년) 초여름에는 기나이, 주고쿠 지방, 시코쿠 지방에서 가뭄이 발생했고, 가을에는 폭우가 내려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장마와 냉풍 피해가 잇따랐다. 전국적으로 폭우, 홍수, 가뭄, 서리, 해충 피해 등 이상 기후가 속출했다. 동일본에서는 태평양 연안보다 동해안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덴포 대기근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간에이 통보를 발행하여 화폐 통일을 추진했지만, 과잉 주조와 흉작에 따른 물가 폭등으로 돈의 가치가 급락했다. 결국 간에이 18년 12월에는 주조를 전면 중단하고, 도카이도 등지의 숙소 마을을 지원해야 했다.
흉작은 간에이 19년(1642년)에도 이어져 백성들의 도산과 인신 매매 등 기근의 영향이 뚜렷해지자, 막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여러 다이묘에게 영지에서 기근 대책을 시행하도록 지시하고, 전국에 검약령을 내렸다. 벼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담배 재배와 매매를 금지하고, 주조 통제(신규 주조 금지, 기존 주조소 생산량 감축)를 시행했다. 잡곡을 사용하는 우동, 칼국수, 소면, 만두, 남만 과자, 소바키리의 제조 및 판매를 금지하고, 구호 오두막 설치를 지시했다. 이는 기독교 금지와 함께 막부가 전국 백성에게 직접 내린 법령으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막부 기근 대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또한,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참근교대가 부과되는 계기가 되었다.
간에이 19년 말부터 이듬해 20년(1643년)에 걸쳐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에도를 비롯한 삼도로 인구가 이동했다. 막부와 여러 번은 굶주린 사람들의 신원을 조사하여, 확인된 사람은 각 번의 다이칸에게 인도했다. 쌀 부족과 쌀값 폭등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묘의 부치미를 에도로 돌려보냈다. 3월에는 전답 영대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대기근의 배경에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의 동아시아 규모의 이상 기후 외에도, 에도 시대 초기 무사 계급의 빈곤, 참근교대와 데쓰다이후신, 장군의 조락이나 닛코 샤산 등과 같은 무단 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막부와 번의 막대한 지출, 연공미를 교환할 시장의 미비 등 다양한 요인이 거론된다.
막부는 무사들의 몰락을 사치와 낭비 탓으로 보고, 무가 제법도 등을 통해 검약을 지시했다. 1635년의 무가 제법도 개정에서 막부는 참근교대를 1년 교대로 의무화했지만, 한편으로는 참근교대에 과도한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당부했다. 무사들의 궁핍은 백성에 대한 더 많은 수탈을 불러왔고, 이는 대기근의 원인이 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간에이 대기근, 로닌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도쿠가와 이에쓰나 시대에 일어난 막부 전복 계획인 게이안의 변 등을 겪으면서, 막부는 무단 정치의 한계를 인식했다. 이후 백성무육(百姓撫育, 백성이 전란과 기근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상황)을 추진하고, 여러 다이묘에게 부과했던 부신 역은 크게 줄이고 참근교대로 대체했다. 여러 번 역시 뒤늦게나마 번정 개혁에 착수했다.
4. 1. 사회적 영향
1642년 6월, 굶주린 농민들은 토지를 대량으로 판매하거나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는 막부에 기근의 규모를 알렸다.[5] 대규모 인구 이동은 에도와 일본의 다른 세 주요 도시에서 인구 변동을 야기했으며, 사람들은 굶주림의 위험이 가장 적은 곳을 찾아다녔다.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는 현재 후쿠시마현 아이즈였으며, 이곳의 지역 농민들은 7세 미만의 모든 아이들을 영아 살해하고,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았는데, 종종 포주에게 팔았다. 높은 이자율 때문에 이러한 대여는 종종 영구적인 노예로 이어졌다. 아이 노예가 도망치면, 농민 부모는 금의 두 배를 갚거나 다른 노예를 제공해야 했다. 127개 마을에서 4년 동안 60명이 노예로 팔려갔는데(판매자에게 돈이 지불되지 않더라도), 노예가 되는 것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福斉物語|후쿠사이모노가타리일본어에 따르면, 교토의 상황은 특히 끔찍했다. 새벽과 황혼에 평소에 피어오르던 난로 연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떼를 지어 돌아다녔으며, 길거리에 시체가 쌓여 있었고, 유아들은 처마 밑에 버려져 굶어 죽거나 개에게 잡아먹혔다.[6] 기후현 나카쓰가와시에서는 간에이 대기근 동안 700명의 인구 중 90명이 굶어 죽었다.[7]
4. 2. 정치적 영향
간에이 대기근은 에도 막부의 정책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막부는 기근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이후 막부의 기근 대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막부의 직접 통치 강화:
- 1642년, 막부는 다이묘에게 영지에서 기아 대책을 지시하고, 전국 백성에게 검약, 벼농사 장려, 상품 작물 재배 금지, 구제소 설치 등을 명령했다. 이는 막부가 다이묘를 거치지 않고 전국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8]
-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참근교대(산킨코타이)를 부과하여 중앙 통제를 강화했다.
- 무단 정치의 한계 인식:
- 시마바라의 난과 간에이 대기근, 게이안의 변 등을 겪으며 막부는 무력만으로는 통치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 백성무육(百姓撫育), 즉 백성이 전란과 기근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대규모 토목 공사를 줄이고, 참근교대로 대체하여 다이묘의 부담을 줄였다.
- 번정 개혁(藩政改革) 시작:
- 여러 번(藩)에서도 막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번정 개혁을 시작했다.
- 농민에 대한 자의적인 세금을 금지하고, 농민 보호 조치를 강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에도 막부가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3. 장기적인 영향
에도 막부는 간에이 대기근을 겪으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1833년 덴포 대기근과 같은 후대의 기근 관리에 활용했다.[8] 기독교의 일본 추방과 함께, 간에이 대기근은 에도 막부가 다이묘를 거치지 않고 전국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번의 다이묘 통치 구조가 간소화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의 자의적인 세금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조치가 강화되었다.5. 한국의 유사 사례와 비교
조선 현종 시대에 발생한 경신대기근(1670년~1671년)은 간에이 대기근과 유사하게 극심한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두 기근 모두 중앙 정부의 구휼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이후 농업 생산성 향상과 구휼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한국사에서는 흉년과 기근이 잦았고, 민중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6. 평가 및 역사적 의의
간에이 대기근은 에도 시대 초기 일본 사회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기근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당시 사회 시스템과 막부의 정책이 민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막부는 기근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다이묘들에게 영지에서 기아 대책을 직접 지시하고, 검약령을 내려 쌀농사를 장려하고 담배 재배를 금지하는 등 구체적인 정책을 펼쳤다.[8] 이러한 정책들은 이후 막부의 기근 대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으며, 후다이 다이묘에게도 참근교대가 부과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기근의 배경에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에 걸친 동아시아 규모의 기상 이변뿐만 아니라, 에도 시대 초기의 무사 계급의 빈곤, 참근교대와 대규모 토목공사 등 막부와 번의 과도한 지출, 그리고 연공미를 교환할 시장의 미비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막부가 무사들의 몰락을 사치와 낭비 탓으로 돌리고 검약을 강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더 많은 수탈을 초래하여 기근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시마바라의 난, 간에이 대기근, 게이안의 변 등을 겪으면서 막부는 무단 정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 즉 '백성무육'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농업 정책과 사회 복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간에이 대기근을 통해 국가의 재난 대응 능력 강화와 취약 계층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즉,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고, 재난 발생 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반면, 국민의힘의 관점에서는, 시장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성이 드러난 사건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즉, 시장의 자율적인 조절 기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활용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日本の大飢饉がどこで起こり、どれだけの方が
https://detail.chieb[...]
[2]
웹사이트
江戸時代の大飢饉0 1、寛永の大飢饉 寛永19(1642)~寛永20(1643)年
http://makejidamac.j[...]
[3]
웹사이트
Japan Dictionary - 寛永の大飢饉 かんえいのだいききん
http://www.nihonjite[...]
[4]
웹사이트
[中学歴史]天保のききん とは?[高校日本史](天保の大飢饉)
https://matome.naver[...]
[5]
웹사이트
飢餓・飢饉(飢きん)の種類一覧
http://ichiranya.com[...]
[6]
웹사이트
江戸の大飢饉 ~この世に現出された凄惨な飢餓地獄を見る~
http://fusigi.jp/wor[...]
[7]
웹사이트
寛永大飢饉の金石碑文
http://www.city.naka[...]
[8]
서적
日本近世貨幣史の研究
思文閣出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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